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필리프 1세 (문단 편집) === 망명 시대 === 1793년,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당하자 [[스위스]]로 망명한다. 이후 [[지리학]], [[수학]], 현대 [[문학]] [[교사]]를 하면서 박봉으로 가난하게 살았다. 1795년에는 [[독일]] [[함부르크]], 1795년에서 1796년에는 [[북유럽]], 1797년에서 1799년 동안은 [[미국]]의 [[필라델피아]]에서 망명했다. 1801년에서 1807년까지는 [[영국]] [[런던]] 교외에서 살았다. 망명 시대의 루이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친척들에게 [[왕따]]를 당했다. 왕위와 [[권력]]을 노린 아버지와 함께 혁명에 가담했고 심지어 아버지가 [[쿠데타]] 음모를 꾸미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다른 부르봉 왕가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. 그리고 지금도 부르봉 가문에서는 오를레앙 가문을 종가[* [[앙리 5세]]가 사망하면서 부르봉 직계가 단절된 이후 [[살리카법]] 원칙상으로는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([[보르본 왕조]])의 수장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 되어야 하나,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의 결과로 체결된 [[위트레흐트 조약]]에 따르면 [[펠리페 5세]]의 후손들(보르본 왕조 구성원)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으므로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. 하지만 소위 [[법통주의]]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오를레앙 가문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, 보르본 왕조의 일원을 부르봉 왕조 및 [[카페 왕조]] 전체의 수장으로 추대했다. 이로 인해 현재는 보르본 왕조의 일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루이 20세로 자칭하며, 자신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대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. 여담으로 루이스 알폰소는 [[펠리페 6세]]와는 육촌이며 그의 외증조부는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이다. 이후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면 스페인 [[작위]]인 제3대 프랑코 공작이 될 예정이다.]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. 망명 생활 중 나폴리의 공주 [[마리아 아말리아(양시칠리아)|마리아 아말리아]][* [[카를로스 3세]]의 3남으로 뒷날의 [[양시칠리아 왕국]]의 초대 국왕이자,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의 시조인 [[페르디난도 1세]]의 6녀이다. [[루이 13세]] 기준으로 하면 루이필리프와 12촌 간이다.]와 만나 흔치않은 연애결혼을 했는데, 문제는 아말리아의 어머니 [[마리아 카롤리나]]가 프랑스의 왕비 [[마리 앙투아네트]][* [[독일어]]식으로는 마리아 안토니아.]와 가장 사이가 좋은 언니였다는 점이다.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자 당시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평생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했는데, 아끼던 여동생의 처형에 일조한 원수의 아들[*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평등한 필리프는 [[루이 16세]]와 [[마리 앙투아네트]]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왕실 가족의 처형에 일조했다.]이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걸 당연히 싫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. 루이필리프가 마리아 카롤리나를 직접 설득해서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는데, 이를 보면 인품 하나는 확실히 대단했던 모양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